상담 에세이

 

상담가  임옥순

                   

너도밤나무여 안녕!

 

가을이면 밤을 줍고, 은행을 줍던 어릴 적 나의 탐심이 아직도 가끔씩 발동한다. 바람이 불던 가을 날 이른 새벽에 바구니 들고 감나무 밑을 살펴 감을 줍던 추억을 어찌 잊으랴! 지난 가을에는 Sam 할아버지 집 뜰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커다란 나무 밑에 떨어진 윤기 나고 땡글땡글한 열매를 다람쥐들의 눈을 피해 주웠다. 종류가 다른 미국 밤일 줄 알고 껍질 채 톡 깨무는 순간 혀끝으로 전해지는 그 떫은 맛은 내게 실망스러움만 안겨 주었다. 분명 맛은 밤은 아닌데 모양은 영락 없는 잘 익은 밤이었다. 그때 미소를 지으며 뜰 앞으로 나오시던 Sam 할아버지께 여쭈었더니 horse chestnut이라 하셨다. 하지만 단어가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아 인터넷을 통해 조사 해보니 너도밤나무과에 속하는 마로니에 나무라고 되어 있었다. 너도밤나무? 그럼 나도밤나무도 있나?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울릉도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산신령이 마을 사람에게 밤나무 100그루를 심지 않으면 재앙이 내릴 것이라 하였단다. 산신령이 긴 겨울 밤 화롯불에 밤을 구워먹고 싶었나 보다. 마을 사람들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 밤나무를 심고 정성껏 가꾸었다. 어느 날 산신령이 나타나서 밤나무를 세어보는데 99그루 밖에 안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시 세어보아도 99그루였다.“이젠 재앙을 피할 수 없겠구나!” 몹시 당황해 불안에 떨고 있는데 옆에 있던 나무 하나가 “나도 밤나무”라고 소리 쳤다. 산신령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정령 너도밤나무냐?” “네 저도 밤나무입니다.” 이리하여 그 마을에는 재앙이 내리지 않았고, 그래서 그 나무를 너도밤나무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너도밤나무 유래를 알고 나니 너도밤나무가 기특해서 지난 가을에 너도밤나무 열매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식탁을 장식해놓고 겨울 내 우리 부부는 너도밤나무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어떻게 저 실한 너도밤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을까? 너도밤나무를 소재로 남편은 교회 주보 칼럼에서, 나는 상담에세이에서 다루었으니 앞 집의 있는 너도밤나무도, 울릉도에 있는 너도밤나무들의 귀가 꽤나 간지러웠을 것 같다. 

 

남편은 동화 속의 이야기 같은 너도밤나무 전설을 소재로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었지만 인간을 살리려 ‘나도 인간이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제로 성탄절 주보 칼럼을 썼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지녀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빌 2:6-7)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내 정체성을 버린다는 것, 내 지위를 내려놓는 다는 것, 내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이, 그리고 같이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썼다.

 

맞다. 예수님은 자기를 버려 인간을 살리셨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에게 가끔은 너도밤나무가 되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분명 아름다운 마음이다. 또는 윤리적 가르침 때문에, 받은 사랑 때문에 자기가 아닌 남으로 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너도밤나무처럼 말이다. 때로는 너도밤나무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때로는 내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다른 얼굴을 가져야 할 때도 있다. 어떻게 매번 내 마음 상태를 얼굴에 그대로 나타내겠는가? 속 상하지만 천사처럼, 슬프지만 행복한 미소를,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속내를 감추고 예라고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무대에서 연기하듯이, 배우가 진정한 배우가 되기 위해서 맡은 배역과 자신을 동일시하듯이 말이다. 속이 아파 슬프지만 행복한 주인공 연기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무대에서 맡은 배역에 혼신을 다해 연기를 한다고 해도 무대에서 내려오면 곧 자기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 정체성 혼돈을 겪으니까 말이다.

나 역시 상담을 하다 보면 내담자의 너무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사연을 들을 때에 내담자의 아픔과 슬픔이 밀려와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내담자와 같이 절망의 늪에 빠지기도 하고, 분노의 폭풍에 휩싸이기도 한다. 상담을 마치고 내담자의 충격과 고통에서 빠져 나오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내 자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혼란스럽고, 머리가 멍하고 몸 안에서 기운이 빠지곤 한다.

 

자기로 살아가도록 돕는 나 역시 아직도 다양한 가면을 쓰고 남으로 살아가는 부분이 있다. 익숙해진 가면 뒤에 숨어 괜찮은 척, 고상한 척, 씩씩한 척, 담담한 척 진짜가 아닌 모습만 보여주다 한 번은 친정 식구들을 당황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뜬금없이 “나도 걸려 오는 전화도 받고 싶고, 남들 받는 소포도 받고 싶으니 한 번 보내보지 그래!”하고 불만 섞인 말을 전화로 툭 던져 놓고서는 얼굴이 화끈거려 나 스스로 무안해할 때가 있었다. 그러고 난 몇 주 후 커다란 소포 한 박스가 우편으로 배달 되어 왔다. 박스를 뜯고 김, 멸치, 미역, 다시마, 고추 가루, 표고버섯가루, 들깨가루 봉지를 꺼내는데 왠 눈물이 주르르 흘려 내렸다. 통화를 할 때마다 미국에도 다 있으니 불편하게 보낼 필요 없다고, 운송비가 더 든다고 큰 소리 쳐놓고서는…. 그러나 진짜 내 속 마음은 미리 알아서 챙겨주고 관심 가져 주기를 기대하고 바래던가 보다. 받고 싶고 주고 싶은 마음이 하나인데 왜 그리 그 모습을 가리고 살았을까? 식구들은 챙겨 줄 수 있어서 좋고 나는 받는 행복감에 빠져 가족들의 정을 느낄 수가 있어서 좋을 텐데…그 후로는 아주 가끔씩 보내 주는 고마움과 받는 재미를 누려 보려고, 사실은 무겁고 녹슨 가면을 벗어보려고 일부러 아쉬운 소리를 해 보곤 한다. 이점에서 남편도 국화빵이다. 남편이 유학을 떠나오기 전에 총장님께 인사 하러 갔을 떼에 총장님께서 부탁하셨다고 한다. “임 전도사, 다 좋은데 딱 한가지만 부탁할까? 신세지는 법을 배우게!”  신세가 아니라 나로 사는 한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아직도 시댁에서 오는 소포는 없다! 없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으로 살기를 반복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범죄심리분석관인 프로파일러(Profiler)들도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감추고 있는 범죄자들의 내면으로 혹은 사건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눈으로 범인과 사건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범인들과 심리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곧 그들이 되기 위해서 자기를 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범죄자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들과 동화된 다음 나오면서 범인들이 숨긴 마음을 같이 가지고 나와야 한다. 이와 같이 프로파일러는 죄를 저지른 범인들의 끔찍한 마음과 동화됐다가 다시 본연의 수사관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죄를 막으려는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수사관들이 범인들의 악한 마음과 동일시하기를 반복하려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이런 아픔은 상담가들에게도 고스란히 반복되는 아픔이다. 내담자와 동화되지 않고 치유가 어렵기에 같이 느끼려고 애를 쓴다. 남을 돕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 해도 잠시 다른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안타깝게 다른 얼굴로 살도록 강요 당하는 이들이 있다. 오래 전에 만났던 분이 생각 난다. 그는 준수한 외모에, 똑 부러지고 강해 보이지만 속은 두렵고, 떨리고, 긴장되고, 불안하고, 화가 나서 세상의 끝이 빨리 오기 만을 기다리며 살았다고 했다.“나는 어릴 때부터 집안의 어른들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어요. ‘야’ 아니면 ‘너 같은 것’또는 늘 욕을 들었어요. 엄마는 내가 아파도 신경 쓰지 않았고, 공부를 잘 해도 관심도 없었어요. 나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해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어요. 그러나 집 밖에 나가면 뭐든지 잘 하고 인정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내가 집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처참하게 견디고 사는지 몰라요.” 그는 집안에서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계속 받으며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존재 해서는 안 되는 사람(Invisible Woman)이라는 가면을 씌워주었다. 그래서 좋은 대학을 나왔고 인정 받는 직장인 인데도 불구하고 늘 언젠가는 사라져야만 될 것 같은 불안과 초조, 무력감으로 시달리다 상담을 받으러 왔다.

 

그를 생각하면 C. S. 루이스의『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라는 책이 떠오른다. 한 인간이 신과 얼굴을 맞대는 자리까지 찾아가는 미묘하고도 신비로운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주인공 오루알은 평생 베일 뒤에 감춰 두었던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되고, 또 신의 얼굴과 맞대는 순간 사랑과 신앙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아직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과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 신의 얼굴을 찾으려면 자신의 얼굴을 먼저 찾아야 한다.”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루이스 말을 기억하며 요즈음엔 내 얼굴 찾는 작업에 더 집중해 본다. 자기 얼굴을 찾기까지 슬프고, 아프고, 무기력하고, 분노의 고통이 되풀이 되지만….

 

너도밤나무는 밤나무가 아니면서 밤나무로 살려다 속이 타서 떫은 맛이 들었나 보다. 다행한 것은 너도밤나무 열매가 독성이 있어 식용은 할 수 없지만 떫은맛을 우려내면 떡을 만들어 먹거나 풀을 쑤어 사용 할 수 있다고 한다. 너도밤나무들에게 마을 사람들을 살렸으니 이제 밤나무인척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면을 벗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너는 밤나무가 아니라 이름도 아름다운 마로니에라고 말해주어야겠다. 오늘도 더 이상 산신령은 없으니 ‘나도 밤나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려 패밀리 터치로 향한다. 패밀리 터치 주위에 심고 싶은 나무가 하나 늘었다. 너도밤나무를 심어 자기로 살지 못하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 앞에서 ‘나는 왜 네가 아닌가’라고 같이 외치고 싶다. 그리고 밤나무들에게도 가르치고 싶다. “그 동안 우리 편 들어주어서 고마웠어! 너도밤나무여 안녕!”내년 가을에는 Sam 할아버지의 집 뜰에 아삭아삭 고소한 맛을 내는 너도밤나무 열매가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다람쥐들이 아직 꿈을 꾸어 있을 첫새벽에 내가 먼저 일어나 마로니에를   바구니 가득 주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