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에세이

 

상담가  임옥순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부제: 'Touch-me-not' 에서 'Touch-me-please'로)

 

“첫눈 오는 날까지 손톱에 봉숭아 물이 남아 있으면 첫 사랑이 이루어 진데!” 어릴 때는 첫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언니들을 따라 정성스럽게 봉숭아 물을 들이곤 했다. 봉숭아 꽃, 잎, 괭이밥 풀에 백반을 같이 찧어 만든 작은 덩어리를 손톱에 올려놓고 잎으로 둘둘 감아 실로 묶고 혹 손톱에서 떨어져나갈까 봐 손바닥을 쫙 펴고 조심스럽게 다녔다. 잠잘 때에도 조심스러워 편히 잠들지 못했지만 어느덧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눈 떠보면 손톱에 하나도 붙어 있지 않아 속이 상했다. 나이가 조금 들어서는 은근히 첫눈 올 때까지 봉숭아 물이 남아 있기를 빌었다. 첫눈 오는 날까지 봉숭아 물이 손톱에 남아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첫 사랑이 결혼까지 이어졌으니 그 해 첫눈이 일찍 내렸나 보다. 애고! 첫 눈이 조금만 더 늦게 내렸으면 …

어렸을 때 줄지어 핀 봉숭아 꽃잎 밑에 대롱대롱 달려 있는 씨 주머니를 툭! 치면 톡! 터지면서 또그르르 오그라드는 모습이 재미있어 꽤나 귀찮게 했었다. 토라지는 친구 모습 같은 봉숭아 씨 주머니, 깜짝 놀라 움켜쥐는 아이의 고사리 손 같이 앙증스러운 봉숭아 씨 주머니가 늘 내게 손짓을 했다. 지금도 그 곳에 봉숭아 꽃이 피어 있을까? 나도, 친구들도 떠났는데 누가 봉숭아 씨 주머니를 툭툭 치며 이야기를 걸어 줄까! 바람이라도 건드려 주었으면 좋을 텐데…

 

상담을 하다가 문득 봉숭아 씨 주머니가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 젊은 아이 엄마가 아들이 자꾸 눈을 깜박이는 버릇이 얼마 전부터 생겼다며 전화로 상담을 요청해 왔다. 몇 가지 아이의 상태를 묻고 나서  “그럼, 엄마는 어떠세요? “ 라고 던진 질문 한 마디에 “사실은 제가 5년 동안 우울증 약을 먹고 있거든요.”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며 힘든 사연들을 쏟아내었다. 마치 봉숭아 씨 주머니가 툭! 하고 터지는 것처럼 그녀의 눈물샘이 터져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세월 억압하여 가슴에 쌓인 아픔이 실타래 풀리듯 줄줄 풀려 나왔다. 그 분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가슴마다 겹겹이 쌓인 삶의 한스런 흔적들이 슬픔을 안고 웅크리고 있다가 누군가 툭! 하고 건드리면 터져 나온다. 처음에는 누가 알까 봐, 누가 터치할까 봐 두려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감추다가도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쌓인 아픔과 슬픔들이 눈물이 되어 흐른다. 한 없이, 한 없이…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욕구와 금기 사이에서 일어난 불안을 처리하고 마음의 평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사실을 숨기거나, 왜곡하거나, 감정을 억압하거나 억제하여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간다. 또한 수용하기 힘든 현실을 만나면 순간적으로 온몸을 고슴도치같이 움츠리고 돌돌 말아 무의식적으로 몸을 숨긴다.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자신에게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다가온다 싶으면 그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고 자신도 모르게 다양한 방어기제를 사용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은근슬쩍 넘겨버린다. 그리고 어떤 창으로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방패 뒤에 숨어 안도의 숨을 쉬게 된다. 억압된 공격충동이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권투, 펜싱과 같은 운동 경기를 통해서 발산되는 것을 일컫는 ‘승화’라는 긍정적인 방어기제도 있지만 대부분의 방어기제는 역기능적이다. 방어기제가 작동하면 잠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다가도 무의식적으로 방어했던 사건들이 어느 순간부터 모습을 드러내면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한다. 역기능적 방어기제를 사용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 어둡고, 탁하고, 슬프고, 우울하고, 절망스럽고, 억울하고, 분하고, 견딜 수 없는 감정들이 쌓여 부글부글 끓게 된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행동을 하지만 어느덧 감정들이 의지의 통제를 벗어나 약한 부분을 뚫고 나오기 시작한다. 즉 이유 없이 아프고, 슬퍼지고, 분노하고, 우울해지고, 짜증나고, 절망하곤 하여 대인 관계가 깨지고,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삶으로부터 도피하기를 반복한다. 따라서 건강하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관계,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방어기제 뒤에 꼭꼭 숨어 있는 아픔들이 걸어 나오도록 도와야 한다. 

 

어린 시절 같은 마을에 한 친구가 있었다. 부자 집 애는 아니지만 시골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가방, 학용품, 유행 옷 등을 가지고 있었다. 내 마음 한 구석에는 그 친구에 대한 시기심, 부러움, 경쟁심, 비교의식 등으로 배앓이를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친구 집에 가서 자주 놀기도 하고 공부도 했었다. 나도 모르게 억압과 부정이라는 방어기제가 작용하여 그녀가 가진 것들을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고, 부정하여 그 친구를 향한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마음 깊은 곳으로 밀어놓고 누가 볼세라 덮어버렸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하교 길에 별일도 아니었을 텐데 그 친구와 심하게 싸워 교무실에서 손 들고 벌을 섰었다. 나 자신도 모르는 그 친구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쌓여 있던 감정의 씨 주머니를 그 친구가 툭! 하고 건드렸나 보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부끄럽고 창피하여 할 수만 있다면 그 사실을 다시 감추고 싶어진다. 그래도 기회가 있다면 그 친구를 한번 만나 보고 싶다. 그 친구는 그 사건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알 수 없는 내 마음의 감정 주머니를 한 번 터뜨려 보고 싶은 마음에서 봉숭아에 대한 꽃말을 찾아보니“나를 건드리지 마세요(touch-me-not)”라고 되어 있었다. 물망초를 “Forget-me-not”이라 하는 것을 보면 봉숭아를 “Touch-me-not”이라 부르는 것이 우리의 정서는 아닌듯하여 우리 민족에게 봉숭아가 어떤 의미인지 찾아보다가 봉숭아 꽃말에 담긴 슬프고도 애절한 전설을 발견하였다. 오랜 옛날 모진 계모한테 구박과 설움을 받다가 도둑 누명까지 쓰고 억울하게 쫓겨 난 한 소녀가 있었다고 한다. 갈 곳 없어 헤매고 다니며 먹지 못하고 병이 들어 더운 바람이 이는 날 어느 집 담장 밑에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가 쓰러져 죽어간 그곳에 이듬해 꽃이 피어났는데 씨 주머니를 건드리기만 하면 죽어서라도 자기의 억울함과 결백을 호소하듯이 툭 터졌다고 한다. 그런 전설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 민족의 한이 그런 전설을 만들었을까? 홍난파 선생이 작곡한 봉선화라는 노래가 흐르는 곳이면 우리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민족적 감정이던 개인의 감정이던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와 우리를 힘들게 하기에 아픔과 슬픔은 풀려야만 한다. 아벨의 피가 하늘에 억울함을 호소하듯이 억압된 것은 반드시 터져 나와야 하고 풀려야 한다. 봉숭아 전설처럼 죽어서라도 맺힌 한은 풀려야 한다.

 

남편을 여럿 두어야 했던 한 많은 사연을 담은 마음을 누가 터치할까 두려워 여인들을 피해 한 낮에 우물을 찾았던 수가성 여인, 꼭꼭 싸매고 감추었지만, 그래도 혹 누가 아픔을 터치할까 사람들의 눈을 피했던 여인의 아픔을 아신 예수께서 그녀의 마음을 터치 하셨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이 말씀 한마디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쌓인 한을 인정을 한다. 숨기고 싶었던 아픈 과거를… 성서에 묘사되지 않았지만 아마 그녀의 볼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을 것 같다. 여자 나이 오십이면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소설 한 권 쓸 아픈 이야기가 있다는데 남편을 여럿 두었던 수가성 여인의 한 많은 삶이 풀리는데 어찌 눈물이 없었겠는가?

 

더디게 상담이 진행 될 때면, 한 마디 말씀으로 아픔의 보따리를 풀어헤치게 하셨던 예수님처럼 원더풀 카운슬러가 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매번 꼭꼭 싸맨 아픔과 슬픔을 터뜨리기까지 버겁게 씨름 하는 내담자에게 예수님처럼 한 말씀으로 마음 깊이 다가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봉숭아 씨 주머니를 터뜨리듯이 아픔의 상처를 툭툭 터뜨리는 상담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함께 울고 웃으면서 아픔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돕고 싶다.

 

 

 올 여름에 자주 방문 했던 분의 집 앞에 심어 놓은 봉숭아 씨 주머니 몇 개를 터뜨리면서 이제는 꽃말이 Touch -me-not! 에서 Touch- me- pleas! 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겉으로는 Touch -me-not! 외치면서 도도한 척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Touch- me- please! 를 눈물로 호소한다. 가슴마다 무슨 슬픔과 서러움이 많은지!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가슴에서 사랑, 그리움과 행복이 봇물처럼 흘러나오는 그 날을 기대하며 내년에는 봉숭아를 여기저기 심어야겠다. 상담이 막혀 힘들 때면 봉숭아 씨 주머니를 톡톡 터뜨리며 용기를 내고 싶다. 마음의 씨 주머니에 쌓인 까맣게 멍든 씨앗들을 꺼내서 멀리멀리 던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