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에세이

 

상담가  임옥순

                   

자운영꽃이 벗겨준 겨울 외투

 

자운영꽃이 피기까지 내게 아직 봄은 오지 않는다. 울타리 밑에 노란 개나리가 손짓을 해도, 앞동산에 진달래가 꽃동산을 만들어도, 복숭아꽃이 문 앞까지 찾아와도 겨울의 끝은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올해도 아직 피지 않은 자운영꽃을 기다리며 긴 머리 소녀 시절로 돌아가본다.

 

연애시절 사랑 받지 않는 여인이 있을까 마는 나만큼 사랑을 흠뻑 받은 여인이 또 있을까? 구름 위를 걷는 듯, 바람을 타고 흐르듯 거칠 것 없는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 했다. 연애 시절 사랑하는 님은 유난히 나의 긴 머리를 좋아했다. 나를 사랑하기에 내 머리 결도 덩달아 비단결 같이 빛나 보였을 것이라 여겨 긴 머리를 관리하는 것도 행복했다. 그런데 남편이 파마 머리를 극도로 싫어하게 된 한 사건으로 인해 긴 머리 소녀는 덕분에 반사 이익을 본 것 같다. 내 지성과 미모가 아니라 긴 머리 때문이었다는 것이 좀 억울하지만 그 시절이 다시 온다 해도 기꺼이 돌아가고 싶다.

 

남편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을 하고 처음으로 파마 머리를 보았다고 한다. 뽀글뽀글 볶은 머리를 하늘로 휘감아 올린 한 여선생님의 모습은 동백기름으로 곱게 빗고 쪽진 시골 아낙네들만 보았던 초등학생에게는 큰 충격이었단다. 귀신이면 꾀죄죄한 얼굴에 머리를 풀어헤쳤을 텐데 오히려 감아 올렸으니 귀신은 아닌 것 같았고, 한 밤중 산속도 아닌 교실에 나타났으니 실성한 사람도 아닌 것이 분명한데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단다. 화장이라곤 결혼식 때에 연지 곤지 찍은 모습을 본 것이 전부인데 창백한 얼굴에 붉은 입술, 짙은 눈 화장까지 했으니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그런데 더 큰 충격은 똑 같은 괴상한 여인 두 분이 교실에 들왔다는 점이다. 그 때 처음으로 일란성 쌍둥이를 보았으니 혼이 빠질 만도 했겠다.

 

시절이 어수선하던 때라 일란성 쌍둥이 중 한 분만 교사 자격증이 있는데도 두 분이 같이 온 것이라 한다. 정식 교사인 한 자매는 앞에서 가르치고, 다른 자매는 뒤에서 매를 들고 아이들이 움직이기만 하면 때렸다고 한다.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놀던 코흘리개 산골 아이들의 몸이 뒤틀리고 좀이 쑤셔 움직일 때마다 뒤에서 날아든 매 때문에 눈을 떼서 뒤통수에 붙이고 싶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그 때 일을 까맣게 잊었지만 파마를 한 여자들만 보면 자신도 모르게 파마 머리 한 여자= 성질 사나운 여자로 단정하고 불쾌해서 멀리하게 되었단다. 매번 파마 머리 한 여자들을 관계 맺기에서 자동으로 제외시키면서도 한 번도 의심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파마와 인격은 아무 관련성이 없는데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엄청난 인지 왜곡이다. 얼마나 많은 파마한 여인들이 오해를 받았을까!

그 때 그 반작용으로 긴 생머리를 한 여자들은 선하고 착한 분이라고 단정했던 것 같다. 그러니 나의 긴 생머리를 보면 착하고 순수하고 좋은 여자로 생각했을 법하다. 내 진정한 모습보다 내 머리에 먼저 점수를 주었을 것으로 생각하니 조금은 억울하지만 어찌 하랴. 나 또한 긴 생머리가 좋아서 연애시절 7년 동안 우연찮게 파마 할 생각은 없었으니 이심전심이었나 보다. 언제 파마를 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미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남편은 파마 머리도 생머리로 보였던 것 같다.

 

이처럼 사람들은 어떤 일이나 사건으로 마음 깊은 곳에 도식을 갖게 되는데 이것을 스키마(Schema)라 한다. 남편은‘파마 머리= 성질 사나운 여자’라는 스키마(인지도식)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스키마는 이후 파마한 사람은 한 성질 하는 여자라고 순간적으로 판단하게 하고 기분 나쁘게 남편을 조정했다. 스키마는 극히 짧은 순간에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지적 오류, 즉 흑백 논리, 주관적 추론,  과잉 일반화, 선택적 추상화, 편견, 왜곡, 등으로 자신과 이웃에게 아픔, 긴장, 분노, 절망, 두려움 그리고 갈등을 주는데 이는 역기능적인 스키마로부터 비롯된다. 부정적 스키마는 많은 이들의 삶에서 행복을 빼앗는다.

 

지난 봄에 상담했던 한 여인은 어린 시절 벼랑 끝에 섰던 삶으로 인해 조금만 실수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갇혀 수십 년을 살아왔다. 그녀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실수를 할 때마다 마치 인생이 끝난 것처럼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 형성된 생각의 틀로 인해 그녀는 삶이 풍성해지고 넉넉함에도 불구하고 늘 초조 했고, 긴장하며 모든 일을 확인 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불안하기만 했단다. 더 이상 벼랑 끝 삶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 상담을 통해 생각의 틀이 바뀌어가면서부터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현재 삶을 바로 보고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푸르름이 밀려오는 들녘을 함께 물들이는 자운영꽃은 내게 겨울의 무거운 외투를 벗겨버리는 긍정적인 스키마와 같아, 해마다 늦은 봄을 나도 모르게 기다리나 보다. 양식이 모자랐던 보릿고개 시절, 자운영꽃은 ‘반양식’이었다고 한다. 자운영꽃을 된장에 무쳐 밥 한 숟가락 정도 넣고 비벼 먹었던 아련한 추억이 내게도 있다. 그런데 그런 추억을 넘어 자운영꽃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따스해지고, 생기가 돌곤 했다. 지금은 자운영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진에 담아 인터넷에 올린 것을 보는 게 전부 이지만 그 순간에도 내 마음은 훈훈해진다.

 

어린 시절 긴 겨울은 내게 도망치고 싶은 계절이었다.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농촌 마을에 살았던 내게 겨울은 두려운 계절이기도 했다. 간첩이 나타났다는 소름 돋는 소문, 스산한 겨울 날씨는 북한이 남침할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공산당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았다며 치를 떠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버랩 되면서 앞산 능선부터 사방이 칙칙해지며 눈보라가 몰아치던 겨울은 두려움으로 내게 자리 잡았다. 뿐만 아니라 무섭게 느껴지는 겨울 산 길을 따라 아버지께 도시락을 가져다 드린 어릴 적 기억이, 나도 모르게 내 마음 깊은 곳에 겨울은 춥고 음산하다는 두려움으로 자리 잡았겠지...

 

그래서 긴 겨울이 지나고 들에 피기 시작한 자운영꽃은 내게 겨울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나 보다. 봄마다 꽃분홍에 하얀 빛이 어우러진 자운영꽃은 한두 송이가 아니라 마치 오천석 님의 「노란 손수건」에 나오는 참나무에 걸린 수많은 노란 손수건처럼 논과 밭, 들, 심지어 골목 담장 아래까지 피어나 겨울이 끝났음을 놓치지 말라고 내게 손짓을 했다. 혹 내가 못보고 겨울의 두렵고 무거운 외투를 벗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듯이 여기 저기에 앞다투어 피어났다.

 

이정자 시인에게도 자운영꽃은 생을 일으키는 스키마였나 보다.

“꽃밭에 스민 마음 한 자락이 갑자기 환해진다

......

자운영 꽃밭을 지나듯 지나온 한 시절이 있어

화인처럼 찍힌 아름다운 날들이 있어

쓸쓸한 한 생을 오늘도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스키마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왜 고통을 받는지 모르고 힘든 세월을 보내다가 상담실 문을 힘겹게 두드린 그들에게 그들만의 자운영꽃을 선물하고 싶다. 겨울에 간첩은 더 이상 오지 않는다고, 눈 사람도 만들고 썰매도 타고, 화롯가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옛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을 키워가는 사람도 있다고 전하고 싶다. 올 봄에도 실버들 가지마다, 목련 꽃봉오리마다, 개나리꽃 가지에도 노랑 손수건을 많이 많이 내걸고 싶다. 희망의 꽃 자운영은 지금 어느 남녘 들을 물들이며 오고 있을까? 은보라 빛 자운영 꽃밭을 마을 마다, 마음 마다  만들려는 꿈을 안고 패밀리 터치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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